시기 : 2025년 9월 27일 오후 1시-5시
장소 : 대구 북구 동화천 - 동구 일제군사동굴
참고 : 9월 29일 오마이뉴스에 기사문 형태로 발표되었던 글을 보완하여 이곳 티스토리에 재수록합니다.

대구 북구 서변숲도서관의 '2025년 길 위의 인문학' 5번째 강의가 지난 27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현장답사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왕건 군대와 견훤 군대가 맞붙어 싸운 대구 유일의 자연 하천 동화천부터 거닐고, 대구시 기념물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이어 대구시 유형문화유산 건물 봉무정, 동수대전 대패 후 달아나던 왕건이 혼자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 마지막으로 1940년대 제국주의 만행의 잔혹상을 증언하는 '일제 군사 동굴'을 찾았다.
동화천 동쪽 동변동 강둑에서 서쪽 서변동 강둑으로 돌다리를 건너면서 "이곳을 답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 장졸과 후백제 장졸의 당시 마음을 느껴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과 부상을 눈앞에 두고 혈전을 벌인 약 1100년 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았을까?" 마음속으로 '빨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을 것'이라 자문자답해 보았다.
양쪽 군대가 너무 많은 화살을 쏘아댄 결과 동화천 하류는 물이 아니라 화'살'이 흐르는 시'내'로 변했다. 그래서 이곳 지명이 '살내'가 되었다고 한다.
버스가 이동하는 중에, 새벗도서관에서 '대구 앞산' 주제의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 중인 김해경 해설가가 프린트한 연습문제(?)를 나눠주면서 답을 맞춰보라 했다. 답사여행 때 이런 형식의 복습(?)은 처음 겪는 일이지만 참신한 진행이라 여겨졌다. 자연스레 공부가 되었다.
1. 927년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동화천 하류부터 파군破軍재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대전투를 치렀다. 금강 중 부소산성 일대를 ‘백마白馬강’이라 하고, 장강長江 중 난징南京 일원을 ‘양쯔揚子강’이라 부르듯이, 동화천 하류에는 ‘살내’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살내를 한자로 나타내면 ‘전箭탄’이 된다. 다음 중 전탄의 ‘탄’과 같은 뜻을 가진 한자가 나오는 설명은? ("전탄의 탄灘은 개울, 여울, 강을 뜻하니 그런 의미의 한자가 쓰인 용례를 찾으라는 이야기로구나!")
(1)고려 말 우탁(1262~1342)이 우리나라 최초 시조로 평가되는 「탄로가嘆老歌」 세 수를 지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져근덧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저/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 라” (나는 "탄로가의 탄嘆은 탄식한다는 뜻이니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대彈琴臺는 1592년 6월 7일 삼도三道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1546∼1592)이 북진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다 실패한 뒤 강물로 뛰어내려 자결한 곳이다. (탄금대의 탄彈은 악기를 연주한다는 뜻이니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3) 충남 공주와 부여, 전북 완주에 탄현 지명이 남아 있다. 그 중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백제가 신라를 막기 위해 탄현炭峴에 방어용 목책을 축조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660년 흥수가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1만 명을 막을 수 있는 곳이라고 조언하였지만, 의자왕은 흥수의 말을 듣지 않았고 신라군은 유유히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싸워 승리했다. (탄현의 탄炭은 숯을 가리키니 역시 답이 못 된다.)
(4) 평평하고 넓은 큰길을 가리키는 탄탄대로坦坦大路는 어려움이 없이 순탄한 사람의 장래를 이르는 말로 흔히 쓰인다. (이 탄坦은 평평하다는 뜻이니 역시 답이 못 된다.)
(5) 한탄강漢灘江은 우리나라 중부 화산 지대를 흐른다. 고석정孤石亭 일대에 임꺽정이 주둔했다고 전한다. (이게 답이다!)
(6) 감탄고토甘呑苦吐는 중국 사자성어가 아니다. 이익에 약삭빠른 사람의 속성을 빗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우리 고유 속담을 정약용(1762∼1836)이 『이담속찬耳談續纂』을 편찬하며 한자어로 옮긴 것이다. 『이담속찬』은 명 왕동궤가 엮은 『이담耳談』에 정약용이 우리 속담을 증보한 책이다. 정약용은 “실학 사상의 집대성자이자 개혁사상가로 평가되는 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이다. (감탄고토의 탄呑은 삼킨다는 뜻이다. 답이 될 수가 없다.)


살내 답사와 해설에 이어 '신숭겸 장군 유적지'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그가 전사한 지점으로 알려진 '표충단'과, 그 일을 기려 세워진 '고려 장절 신공 순절지지' 비석이 핵심 답사지였다. 927년 신숭겸과 김락 등 고려 장졸들이 왕건을 지키려다 이곳에서 순국했다. 당시 신숨겸은 왕건의 옷을 입고 임금인 척 행동하는 절'묘'한 '지'혜를 발휘해 후백제 군대를 속였다. 이곳 일대에 '지묘'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다.
김해결 해설가가 또 연습문제를 제시했다.
신숭겸의 절묘妙한 지智혜가 왕건을 살렸다 하여(위왕대사爲王代死) ‘신숭겸 장군 유적지’ 일원에 지묘智妙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120년 고려 예종은 서경에 행차해 국가 단위 불교 행사 팔관회를 여는 중 공산 전투에서 태조를 살리기 위해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기려 8구체 향가를 지었다. 이 노래의 제목은 [*]이장가*二將歌이다.
답은 도이장가이다. 신숭견, 김락 두['二'] '장'군을 추'도'하여 지은 노래['歌']이다. 제목을 암기해 있지 않아도 추론을 통해 답을 알 수 있는 문제이디 훌륭한 출제로 여겨진다.
세 번째 답사지는 대구 유일의 공공기관 유적인 봉무정이었다. 조선 말기 고종 시대 최상룡이라는 선비가 사재로 건축해 요즘의 동사무소로 사용하도록 국가에 헌납한 건물이다. 대구 유일의 공공기관 유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개인이 공공기관 건물을 지어 사회에 기부했다는 해설에 답사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선행자의 덕을 기렸다.
봉무정 바로 아래 비탈에 독좌암이 있다. 후백제 군대의 추격을 피해서 달아나던 왕건이 혼자(독) 앉아(좌) 잠시 쉰 바위(암)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다만 경사가 급한 비탈에 바위 자체도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까닭에 왕건처럼 올라가서 앉아보는 체험은 안전 상 불가능했다. 왕건은 독좌암을 떠나 시량리, 안심, 앞산, 성주를 거쳐 개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김해경 해설가가 "다음 중 역사 사실과 부합하는 내용은?" 하고 물었다.
(1) 신라 경순왕은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치욕을 당했다. (경순왕이 아니라 경애왕이다. 틀렸다)
(2) 신라는 668년 통일 이후 경덕왕(742∼765)까지 전성기이고, 그 뒤 혜공왕 이후 하대는 18명 임금의 평균 재위 기간이 8년에 불과했다. (답이다!!!)
(3)견훤 사후 후백제 2대 왕으로 즉위한 맏아들 신검은 아버지의 영광을 이을 만한 왕재가 아니었다.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
(4)동수대전 대패 뒤 고려로 돌아간 왕검은 정치부심 노력하여 신료와 장수들의 인심을 얻은 끝에 궁예를 몰아내고 임금이 되었다. (동수대전 당시 왕건은 즉위 10년차였다.)
김해경 해설가가 또 "다음 중 왕건과 관련해 생겨난 이름으로 볼 수 없는 것은?" 하고 질문했다.
(1)안심安心: 멀리 달아났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2)반야월半夜月: 멀리 달아나 어느덧 달이 하늘 중턱에 떠 있었다.
(3)해안解顔: 멀리 달아났다 싶어 굳었던 얼굴이 풀렸다. (틀렸다. 해안은 신라 경덕왕 당시에 이미 존재했던 지명이다.)
(4)무태無怠: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왕건이 군사들에게 훈시했다.
(5)불로不老: 모두 전장으로 나가버려 동네에 노련한 장정들이 없었다.
(6)연경硏經마을: 유교 경전을 읽는 선비들의 목소리가 마을에 가득했다.
(7)파군破軍재: 군사들이 파괴된(죽고 다친) 고개


마지막 답사지 '일제 군사 동굴'은 참가자들의 공분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1940년대 일제는 이 지역 한국인들을 강제 동원해 이곳 암석 산비탈에 동굴 10기를 팠다고 한다. 장비도 주지 않고 각자 집에서 가져온 호미 등으로 암석에 구멍을 내고 그것을 키워 동굴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는데 기록이 없어 피해 상황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는 지금의 대구국제공항 자리에 설치했던 군사 비행장을 목표로 미군 비행기가 공격해오면 그들을 격추하기 위해 동굴을 파고, 안에 대포를 숨겨두었다고 한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국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적나라한 유적지가 바로 이곳 봉무동 일제 군사 동굴 진지이다. 많은 학교와 학생들이 그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답사지로 이곳을 선택해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팔고개' 비석을 보았다.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독전을 위해 나팔을 불면서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요즘은 도로를 내고 아파트를 짓느라 산비탈이 깎여서 고개 같은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득한 옛날에는 만만찮은 고갯길이었을 것이다. 길재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고 했지만, 산천도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많이 변하고 있다. 대구 유일의 자연하천 동화천이 본모습을 고이 잘 보존한 채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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