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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독립지사

myview7264 2026. 3. 11. 01:15

61세 고령에 러시아로 망명한 선비 독립지사

건국훈장 대통령장 서훈 이승희 지사 생가와 관련 서원 답사

 

한주종택(이승희 독립지사 생가) 사랑채 ⓒ 김명희관련사진보기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은 대한민국장이다. 수훈자는 모두 33명으로, 손문 등 중국인 5명을 제외하면 한국인은 28명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장 다음 등급은 대통령장으로 총 92명인데 경북 성주 이승희(1847∼1916) 지사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이승희 지사의 성함은 알지 못해도 그의 출생지 마을 이름은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한자로는 대포리(大浦里)이지만 그렇게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고, 모두들 순우리말 지명 '한개마을'을 즐겨 쓴다. 한개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백천)에 큰 나루가 있었다는 뜻이다.

동네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유산인 한개마을

한개마을은 동네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유산이고, 가옥 중 열 채는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이다. 60여 채의 한옥들이 뒷산(영취산)까지 이어져 있어 토담길 골목을 굽이굽이 걷노라면 아늑한 정취에 젖어든다. 전통미 우아한 이 집성촌의 맨 안쪽 높은 자리에 이승희 지사 생가가 있다.

지사의 생가는 '한주 종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주는 이승희 지사의 아버지 이진상의 호이다. 이진상은 성주 회연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조선 후기 대학자로, 파리장서의거 대표 곽종석과 국채보상운동 고령군 대표 이두훈 등을 길러냈다. 곽종석보다 한 살 아래인 이승희도 자신의 아버지 이진상의 제자이다.

이승희 지사의 아버지 이진상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성주 회연서원 누각에 '見道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발음은 "견도루"가 아니라 "현도루"이다. ⓒ 김명희관련사진보기


이승희 지사의 특히 놀라운 점은 61세나 되는 고령에 러시아로 망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08년 4월 19일 한개마을을 출발해 부산에서 배편으로 조국을 떠났다. 을사늑약 폐기와 오적 처단을 주장하다가 끌려가 고문을 당한 노구를 이끌고 동해 건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으니 참으로 대단하고 눈물겹다.

지사는 망명길에 오르면서 성주 지역 뒷일을 김창숙에게 부탁했다. 스승 이승희가 제자 김창숙에게 맡긴 임무 중 하나는 한개마을에서 2km가량 떨어진 삼봉산 기슭의 삼봉서당을 관리하고 승격시키는 문제였다. 11년 전(1897년) 강당과 동·서 양재로 출발한 삼봉서당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막혀 사당 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김창숙도 1919년 파리장서 의거 때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한 관계로 삼봉서당은 2016년에야 서원이 되었다.

삼봉서원의 사당에는 '見道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자칫 "견도사"로 읽기 쉽지만 "현도사"가 옳다. '見道祠'는 회연서원 누각 '見道樓'에서 왔다. 이진상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회연서원이었으므로 그를 모시는 삼봉서원의 사당에 그곳 이름을 차용했던 것이다.

삼봉서원 사당 현도사(見道祠) ⓒ 김명희관련사진보기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08번지의 한주종택, 같은 대산리 914-3번지의 삼봉서원, 수륜면 신정리 258번지의 회연서원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이승희 독립지사 관련 유적들이다. 답사를 떠나기 전에 충분한 배경지식을 쌓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뜻에서 다녀온 뒤 지사에 대해 더 알아보았다.

이승희 지사는 20세 때((1867년)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시국 대책문을 흥선대원군에게 올려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35세 때(1882년) 외세 척결을 주장하는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지어 나라가 맞이한 위기를 역설하였다.

49세 때(1896년) 곽종석·이두훈 등 아버지 이진상의 제자들과 함께 일제를 규탄하는 '이토일본국사통고천하각국공관문(以討日本國事通告天下各國公館文)'을 지어 각국 공사관에 보냈다. 58세 때(1905년) 을사늑약 파기를 주장한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가 일제에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지사는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
"이등박문은 천하강상지적(天下綱常之賊, 세상의 근본을 허물어뜨리는 도적)이다!"

59세(1906년)에 출옥한 지사는 그 이듬해(1907년)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 일본의 조선 침략 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심판을 호소하기 위해 '여화란국해아만국평화회중서(與和蘭國海牙萬國平和會中書)'를 지었다.

삼봉서원 ⓒ 김명희관련사진보기


마침내 61세이던 1908년, 지사는 머잖아 국권을 잃게 될 것을 예견했다. 일제의 노예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지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떠돌이로 살아가는 동포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독립운동의 기반 구축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지사는 공동체 마을 조성에 모든 힘을 쏟았다.

이윽고 1909년, 러시아 국경 봉밀산 아래에 100여 가구 한인촌을 조성했고, 이름을 '한흥동'이라 붙였다.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민학교도 세웠다. 그 뒤로도 지사는 한인 공동체마을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은 "한인 공동체마을 운동에 관심이 있는 망명 지사 중에 이승희 선생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독립 이전에는 시신으로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는다"

지사는 동지와 가족들에게 평소 "나는 독립 이전에는 죽은 시신으로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1916년 2월 27일 망명한 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관을 고향으로 옮겨 와 장례를 치렀다. 어찌 타국에 버려둘 수 있겠느냐는 마음들이었기 때문이다.

61세나 되는 고령도 아랑곳하지 않고 멀리 러시아까지 망명해 민족공동체 마을 건립 운동에 매진하다가 69세에 쓸쓸히 타계한 이승희 지사! 그의 생가와 서원을 찾아 많은 후대인들이 참배하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간략한 글 한 편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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